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빙그레 이글스 (문단 편집) === 1993년 === 신인드래프트에서 1차지명으로 대전고-한양대를 나온 특급 좌투수 [[구대성]]을 뽑았다. 2차지명으로는 허준, 지화선, 이민호 등을 뽑았다. 그 외에는 공주고 출신의 투수 [[노장진]]이 원광대학교 합숙훈련 중 뛰쳐나와 빙그레 이글스에 계약금 4천만원에 입단했다. [[조양근]]은 LG 트윈스의 투수 이국성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원년 에이스 [[한희민]]은 송진우 밀어주기와 관련된 구단과의 마찰로 삼성 박철희와 트레이드되어 이글스를 떠났고 [[김대중(야구선수)|김대중]]과 [[김홍명]]은 은퇴했다. 1992년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자 빙그레는 1993년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와 부상 문제를 겪으며 결국 몰락하게 된다. 시즌 전부터 이정훈과 장종훈은 동계훈련에서 각각 발목 부상과 무릎 부상을 당했고 이정훈은 부상에 신음하며 단 41경기 출장에 그쳤고 장종훈도 시즌 중 잔부상에 시달리며 투고타저를 감안하더라도 이름값에 걸맞지 않는 17개라는 저조한 홈런 기록으로 마쳤다. [[강석천]]은 부상 여파로 76경기만 출전해 .249의 타율에 9홈런에 그치며 부진했다. [[이강돈]]은 타율 .233으로 커리어로우를 찍었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구성원이었던 김상국과 강정길은 각각 1할대 타율과 6홈런에 그치며 부진했고 팀컬러였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물타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이정훈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은 [[진상봉]]이 10홈런에 타율 .279를 기록하고, [[지화동]]의 동생 지화선이 .277의 준수한 타율을 보여주기도 했다.] 투수쪽에서는 방위병이었던 정민철이 13승 3패의 방어율 2.24의 빼어난 피칭을 보였고 [[한용덕]]이 2.98의 방어율에 10승을 거뒀고, [[이상군]]도 승수는 7승으로 적었지만 2.52라는 좋은 방어율을 보였다. 하지만 지난해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혹사당한 송진우는 72.2이닝 7승 7패 8세이브에 3점대 방어율로 어중간한 시즌을 보냈다. 특급 신인이라던 [[구대성]]은 아마야구에서의 혹사여파로 6경기에만 출장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투수난에 시달린 빙그레는 삼성 [[이상목]]을 상대로 백업포수 [[박선일]]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71500209123005&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7-15&officeId=00020&pageNo=23&printNo=22229&publishType=00010|비마저 독수리를 버리는가]]비로 인한 불운도 심했는데 태평양과의 개막전에서 장종훈의 홈런으로 경기에서 앞서나갔으나 우천 노게임을 당하며 불운이 시작됐고 이후 LG와 OB전에서 앞서던 경기를 우취당한 뒤 더블헤더 편성 경기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7월 13일 잠실 OB 원정경기는 일기예보를 통해 서울에 비가 거세게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대전에 머물러있다가 경기를 개시한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짐을 꾸려 경기 시작 30분 전 겨우 도착했고 결국 OB의 에이스 김상진에게 완봉승을 헌납하며 0대1 영봉패를 당했다. 그 다음날에는 4:2로 이기던 경기에서 우천 노게임이 되었으며 15일 더블헤더에서는 결국 두 경기 모두 패배해 OB와의 잠실 3연전에서 스윕패를 당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71400329119008&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7-14&officeId=00032&pageNo=19&printNo=14810&publishType=00010|#1]]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71500329119003&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3-07-15&officeId=00032&pageNo=19&printNo=14811&publishType=00010|#2]] 6월 2일에는 대전구장에 비바람이 몰아쳐 조명탑이 기우는 바람에 두 달 동안 청주에서만 홈경기를 했는데 이 때문에 방위병이었던 정민철이 청주 홈경기에 출전할 수가 없었다. 휴가를 얻어야만 갈 수 있는 '가깝고도 먼 홈구장'이 되었다. 빙그레 입장에서는 원수같은 비가 아닐 수 없었다. 8월 승패마진 -15까지 추락하였으나 9월 한 달동안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여 기어이 최종전에 승패마진을 0으로 맞추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6월~8월 중순까지 워낙 부진했기 때문에 순위를 뒤집기는 어려웠고, 결국 4위 LG와 4.5게임 차 5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6년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고 말았다.[* 2022년의 [[NC 다이노스/2022년|NC]]와 비슷한데, NC 역시 시즌 초반에 부진하였고 후반기 뒷심을 발휘하여 5위 KIA를 추격하였으나 순위를 뒤집지 못한 채 6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나 몰락했어도 5할 승률은 고수하였으며,[* 그러나 다른 일면에는 쌍방울과 태평양의 이중 동네북으로 인해 다른 팀들의 승률이 올라간 원인도 있다. 이글스는 이해 쌍방울에게 14승4패를 거두며 완전히 압도했으나, 태평양에게는 8승3무7패로 호각이었다. 중반까진 4위권이었으나 6월 10연패를 찍고 대전구장을 강풍 때문에 쓸 수 없어 방위병 정민철이 청주경기에 출장이 안됐다. 1993년의 빙그레는 짝수개 구단 체제 단일리그에서 승률 5할을 달성하고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첫 사례였다.] 이글스는 88~94까지 7년 연속 5할 승률 이상을 달성하게 된다. 이후 이글스는 1994년부터 [[한화 이글스]]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인 1996년 신인 4인방이 등장 때까지 이렇다 할 선수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몰락과 동시에 모기업인 [[한화그룹]]이 2세 오너 체제로 재편되면서 상속 분쟁으로 인해 [[빙그레(기업)|빙그레]]가 [[한화그룹]]에서 이탈하여 자연스럽게 야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형제간의 재산분할로 인해 그룹인 한화는 장남 김승연에게, 빙그레는 차남 김호연에게, 그리고 제일화재(現 한화손해보험)는 장녀 김영혜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사실 2세 오너의 경영은 1980년대부터 이미 하고 있었다.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1981년에 갑작스럽게 타계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재편은 그룹 구조의 재편이었다. 이후 1993년 시즌 종료 직후 11월 1일에 [[한화 이글스]]로 구단명이 변경되어 1994 시즌부터 [[한화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리그에 참가하게 된다. 프로야구 첫 700승을 달성하며 유종의 미는 거둔 [[김영덕]] 감독은 현장에서 물러나 은퇴했고, [[강병철]] 감독으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이후 모든 역사에 대해서는 [[한화 이글스]]쪽을 참고할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